바람이 옷깃을 서걱거린다. 깃털이 움직이듯 바람에 몸이 끔쩍거린다면 가을이 온 것이다. 지난여름 밤, 공간에서 준비한 불면의 밤, 그 긴 밤에서 만난 긴 겨울이야기 한 편을 소개한다. 영화는 네 편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서 잠깐만 언급하련다. MBC 타임에서 기획한 이명세 감독이 그동안 영화를 함께 했던 배우들을 찾아서 인터뷰한 ‘M’. 강수연, 하지원, 이연희, 김혜수 등 여배우보다 떨어지는 낙엽에 집중할 정도로 아름다운 화면을 고집하는 이명세 감독의 감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졸음을 쫓았다. 그리고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이쁘고 이쁜 대만영화지만 나는 졸다가 일어나보니 영화는 끝나고 다들 흡족한 표정으로 이런 취향의 영하 정말 좋아요, 여배우 다른 영화는 뭐있어? 등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정신을 차리고 내가 보고자 했던 바로 그 영화, <혜화,동>이다. 밤이 넘어간다.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23살 혜화(유다인)는 유기견을 돌보며 살아간다. 그런 혜화 앞에 5년 전 갑자기 사라졌던 옛 연인 한수(유연석)가 나타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둘은 고등학생 때 서로 사랑했지만 원하지 않던 임신으로 헤어졌다. 혜화는 아이를 낳았고, 아이는 죽었다. 혜화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한수는 죽은 줄 알았던 자신들의 아이가 살아 있고, 입양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처음에 혜화는 한수의 말을 믿지 않고 무시한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한수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혜화는 아이를 찾아 나선다.
밝고 재미있는 영화를 주문했지만 음, 이 영화 글쎄다. 하지만 희망적이라고 위안한다. 일찍이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2011년의 포문을 여는 독립영화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많은 평론가들이 “올해 부산영화제가 발견한 제2의 여자 정혜, <혜화,동>” 이라 평하며 민용근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에 방점을 찍었으며, 남, 녀 배우의 연기력에 찬사를 보내며 “근년 들어 가장 새로우면서도 감동적인 성장영화” 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거짓이 아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혜화의 클로즈업된 얼굴의 표정은 영화의 세밀한 감정의 흐름을 잡아가고, 찌질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한수는 성장영화 어디에나 나올법한 아직 덜 큰 아이 같았다. 조금 더 성숙한 스물 셋 혜화와 조금 덜 성숙한 한수의 이야기는 지난겨울을 보내고서야 서로 마주서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며 철거촌에서 유기견을 데려다 돌보는 동물병원의 혜화와, 고교 시절 사랑했던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남자는 떠났고 아이는 죽어버린 줄 알고 있었던 미혼모 혜화 사이를 오가며 잘 짜인 구성을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의 반전까지 영화는 내용은 참 간단한데 긴장은 놓지를 않는다.
영화를 보고나서 그런데 제목의 동이 뭐야? 미리 커닝을 좀 했더라면 제작진의 의도를 멋지게 얘기해주는 건데 아쉽다. 간추리면 이렇다. 혜화의 마음은 겨울(冬)이다. 얼어붙은 혜화의 마음을 녹이는 건 한수가 말한 아이(童)다. 움직이는(動) 혜화의 마음에 한수는 가닿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같은(同)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네.
이 영화는 밝은 영화도 아니고 재미있는 영화도 아니고 잘 만들어진 영화다. 사람 수 만큼이나 나오는 많은 유기견들, 도저히 사람이 사는 방 같지 않은 유기견을 돌보는 혜화의 방, 철거촌에서 버려진 삶의 흔적들, 현실의 엄마가 되어 아이를 만나러 갈 때를 제외하고 계속 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혜화, 부인과 사별하고 아이와 동물과 함께 사는 동물병원장, 그 곁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아이에게 엄마역할을 해주는 혜화, 혜화의 늙은 엄마와 한수의 매정한 엄마, 과거에 얽매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수, 아, 계속해도 밝고 환한 이미지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나서 별을 붙여주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어떤 위안과 어떤 위로와 어떤 감동을 받았을까? 민용근 감독은 유기견을 쫓아다니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탈장된 개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 여자의 공허한 느낌에서 <혜화,동>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만난 그 여자의 공허함은 이제 지난겨울을 보낸, 돌이킬 수 없는 시절이 누구에나 있는, 아린 청춘의 성장을 지나온 그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사람들은 그래서 안도하는 걸까? 아무튼 이제는 한수가 고집은 좀 부리지 말고 정신 차리고 멋진 놈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혜화의 돌아봄이 열린 결말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니, 저 답답한 한수를, 하지만 어쩌겠는가, 혜화에게 그것이 다시 시작이라면 시작일 것이니.
<혜화,동>이 먹먹한 성장영화라면 불면의 밤 네 번째 영화 <순수소녀>는 치명적인 성장영화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배우의 연기는 순수했다. 이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시작한다. 밤이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