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17일 무렵 헌법 재판소 앞. 이상하게 조용합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텐데....... 장소변경이 일어난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문 수위에게 오늘 여기서 “유신헌법 3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하는 것인지 확인해봅니다. 제때에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서 온 것인데 그 대회가 진행될 방에 이르기까지 30년 세월의 우여곡절의 무게에 비해서 너무도 불협화음을 이루는 “고요함”!!!
내가 자료집을 받는 시각이 공지된 대회 시작 시각 10분 전인가 그런데 발표자 그리고 관계자 외에는 청중이 아니라 “망각”이 그 공간을 점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법고시 준비생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인가?! 請禍隊 무리가 급하면 쓸 수 있는, 헌법(憲法)을 헌 종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그 악의 세력에게 “국보급인 법”의 덫에 걸린 나와 같은 사람이나 관심을 가지는 이런 나라!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 피기를 바라는 일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일과 같다”는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촌철살인”이 깊숙히 깊숙히 찌릅니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부러진 화살”은 내게 “염궁”(念弓:생각의 화살)로 날아왔습니다. 이 화살은 정의의 최후의 보루가 아닌 “불의의 최후의 보루”의 역사를 지닌 사법부에게 그리고 역사적 기억을 눈앞의 이익 앞에서 하챦게 여기는 남한의 암컷들과 수컷들에게도 진지한 성찰을 촉구하는 “염궁”으로 날아가기를 바랍니다.
일단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교수를 상대로 검찰이 증거를 왜곡하고 은폐하며 사회적-인간적 “양심”의 기대를 받는 재판관이 그런 사실이 명명백백해진 상황에서도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의 너무도 정당한 요구에 악랄한 “미필적 고의”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짓거리를 보면서 이른바 “민주화 시대”에도 이런 작태가 횡횡을 하고 있으니 통장 잔고가 10만원도 남아 있지 않다는 역도(逆盜) 전두환과 박정희 시대에 교수만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지 않은 서민들은 도대체 어떤 재판을 받았겠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새삼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이 사회의 낙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법 철학자 옐리네크는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법언(法諺)을 남겼지요.
이런 최소한의 도덕성조차 “현실주의적”으로 내팽개친, 사회-정치적으로 중대한 사건을 검찰이 “과잉행동”으로 기소하거나 민중의 결코 병적으로 흥분한 것이 아닌 “법 감정”을 이유 없다고 기각하며 사법적 판단이 가해진 사건이 이 사회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이틀 전인가 무죄판결을 받은 한명숙 전 총리의 경우 고인이 되신 강원룡 목사님이 설립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강사로서 1979년 3월 9일 5적(오늘날에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의 여론을 이간시키면서 전격적으로 군사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간성(奸星)인 장군, 가전제품까지도 담합해서 소비자들을 머저리 같은 놈들로 취급하는 강도귀족 재벌, 부동산 투기라는 합법적 강도질에 살맛나는 장차관, 미국의 무자비한 독점자본들의 하수인으로서 한-미 FTA 통과에 안달하는 국회의원, FTA의 피해를 입기 시작하는 농민들에게 동물을 굶어죽였다고 과태료를 부과하는, 질 나쁘지만 고급이라고 부당대우를 받으면서 양심의 가책에 둔감하기가 발바닥 같은 고급 공무원들 같은 암수컷들이 이런 쓰레기들 입니다)에게는 “국보급인 법”의 덫에 걸려서 1개월 이상 불법구금을 당하면서 중앙정보부에서 얼마나 고문을 받았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인권변론 한 시대: 홍성우 변호사의 증언], PP. 294~307, 2011년). 이 사건에는 현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이신 김세균, 노동법 학자로 기여해 오신 신인령 교수 등등의 민주인사들이 고초를 겪으셨는데 이 분들의 죄라는 것이 좌익서적을 읽는 “독서클럽”활동을 한 것이었지요. 홍 변호사께서는 이 사건만하더라도 당시 기준으로 “제일 행복하게 재판 받은 사건”이라고 평가하실 정도니 “박정희의 철권정치” 시대를 “산업화”를 이룩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적 안질”을 일으키는 짓거리입니다.. 이런 어불성설의 반 논리에서는 전태일 열사는 “산업역군”(力軍-사실 이 말 자체가 군국주의적 ?냄새를 풍기는데 Marx 역시 산업예비군-Industrial Reserve Army-라는 용어를 썼기에 일단 넘어갑니다)이 아니라 “산업역군”(逆軍)으로 보겠지요.
“不知法之義 而正法之數者 雖博臨事必難”(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법조문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은 비록 널리 안다하더라도 소송에 임하게 되면 반드시 혼란에 빠질 뿐이다).
남한의 “법치”(法恥)는 약 2200년 전 중국의 법가의 이 법언에 비추어보더라도 분명합니다. 이 법언을 두고 생각해보아야할 점은 법을 “누가 어떤 동기에서 입법”했는가 라는 점 그리고 그 법의 뜻을 “어떤 맥락에서 어떤 사상적 입장에서 해석-적용하는가”라는 점입니다.
최근 대법원장이라는 수컷이 한미 FTA의 국가-투자자 소송과 관련해서 재판관들이 “연구 대책본부”(Task Force)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제동을 걸려는 헛소리를 하는 것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면 그 뜻이 누구 좋은 일인지는 분명합니다. 오히려 미국의 주 대법원장들이 투자자 소송이 “사법주권 훼손”이라고 선언하는 것을(<경향신문> 2011-12-05, 8면) 보면 장려하지는 못할망정 “정당방위”를 억압하려는 이 수컷의 작태가 얼마나 멍멍타령인지는 분명합니다.
민주노총의 지도위원 김진숙씨가 목숨을 걸고 3백 수십 일을 크레인 고공농성을 벌이게 된 사연도 싸구려 임금을 찾아가는 동시에 자국의 노동자들을 생존권의 벼랑으로 몰아넣는 “독재적-수수한(獸秀-뛰어난 짐승성) 경영권”을 휘두른 결과에 따른 것이지요. 노동자 계급이 대동단결해서 투쟁하지 못하고 패배주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실종된 감이 드는 입장이 “노동자의 경영참여권”입니다. 경제 민주화에 관한 이 권리는 이미 제헌국회에서 제안되었으나 10표 차이로 “헌법화”가 좌절되었음을 알아야합니다(곽노현, “경영-인사권은 노동자의 기본권이다”, [사회평론], 1991-6월호, 260면).
노동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의지를 합법정당의 형태로 대변하고자 결성된 민주노동당이 좌편향적인 분열을 하더니 이제 우편향적 “통 큰 야합”을 하는 한심하고 한심한 작태를 보면서 “저항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적 현실에서 국회는 “계륵”적 성격이 특히 큽니다. 그런 만큼 의회투쟁과 장외투쟁을 상황에 따라서 적절히 배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국내외 상황을 생각할 때 혁명적 상황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작다는 판단에서 사회 민주주의적 노선을 취할 수는 있지만 유의해야할 점들이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노동운동의 강점, 단결과 통합이 가능할 수 있었던 원인은 “계급정치”가 그 전제였으며 그 기초는 “교육을 통한 노동계급 문화의 형성” 그리고 “계급투쟁”을 통한 비 노동계급의 견인으로 정치-사회적 기반을 확대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민중은 이런 역사적 경험을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보는 “지적 성실성과 조직적 끈질김”입니다.(Francis Castles, [The Social Democratic Image of Society], 1978년).
“계륵”인 국회가 “정언”(正言:불교의 8正道 중 한 가지 실천덕목으로 진리와 윤리적인 발언을 하는 일)을 하도록 책임감을 일깨우는 행동이 “저항권”적 행동입니다. 로크는 [정부에 대한 두 가지 논문]에서 이렇게 저항권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권위자가 법에 의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고 ...이때에는...그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다”, “...오히려 압정자에 대한 외경은 반드시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곤봉으로 정수리를 맟는 것이 될 뿐이다. 따라서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반격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平野義太郞, “저항권과 그 이론”, 조국 편역,[실천법학 입문], PP. 272~297, 1991년). 로크의 저항권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악의 세력”에 대한 “정당방위권”을 “실천”을 통해서 주장한 입장을 프랑스 혁명기 국민공회에서 제정한 헌법 제 35조의 규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부가 민중의 제권리를 침해할 때에는 폭동(Insurrection)은 민중 및 민중의 각 부분에 있어서 가장 신성한 권리이고 또한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최근의 “희망버스” 운동, 그에 앞선 미국산 쇠고기의 무분별한 수입 움직임에 저항한 “반 FTA 전초전”은 이런 저항권의 초보적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법치(法治)라고 할 때 올바르게 성찰할 점은 ”정의의 최후의 보루일 뿐만 아니라 그 시원(始源)은 민중의 깨어있음과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GDP가 세계 10~12위 국가임에도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살아가기가 어렵기에 맞벌이를 할 수 있으면 맞벌이를 하는 시대에 산후 휴가를 100일씩이나 누리고 남편도 출산휴가를 누릴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요? 유네스코가 교육과 관련해서 수여하는 상의 모범이 된 분 “세종대왕”이 노비에게 실시한 정책이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박현모, [세종처럼: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 PP., 330~331, 2008년). 유럽의 민중이 피로써 쟁취한 투표권으로 간접 살인자들과 강도놈들을 선출하는 머저리 노예들의 처지를 벗어나려면 이런 진지한 영화를 보고 “학습”을 해야 합니다. 2011년 인권영화제에서 조지 무어 감독의 <치코>의 한국판인 영화가-의대 출신인 감독이 촬영-우수영화에서 탈락시킨 이유라는 것이 “너무 가르치려한다”는 것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먹는 문제에 골몰하는 취업교육 외에 한국에 인간이 개성을 발전시켜 3대 소외(자신의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다른 사람과의 상호성장을 연기(緣起)하는 관계로부터의 소외&자연으로부터의 소외)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으로서 “교육”이랄 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가정&학교&일상생활-붕괴되었다고 봅니다. “너무 가르치려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에는 우매한 “개인주의와 자기애(Narcissism)" 그리고 열등감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패션처럼 제 멋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중우정치의 짐승보다 못한 체제, 파시즘의 온실입니다. 이런 편향은 독서가 부족하여 깊고 넓은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개발되지 않은, ”기술적으로 첨단인 어리석음“이 창궐하는 현재 한국회의 미성숙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정신적 병폐가 아닐까요? 한국의 교육열이라는 것은 생존의 불안감으로부터 혹은 짐승만도 못한 ”부와 권력에의 참을 수 없는 발정“으로부터 나오는 열등한 열병입니다. 나는 향후 "사회적 네트워크 서비스”(SNS)와 “스티브 잡스”에 대한 편향적 입장을 비판하는 글을 쓸 것입니다.
이 영화와 함께 <13인의 성난 사람들> 그리고 <나생문>(혹은 <라쇼몽>)을 시청하면서 비교하면 대단히 바람직할 것입니다. <13인의 성난 사람들>은 배심원 제도를 어떻게 운용해야 그 “중지”가 재판장과 검찰의 실수를 막을 수 있는 지를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해주며 <나생문>은 동일한 사건의 “실상-진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하면 현실의 총체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해줍니다. 이 세 영화의 공통분모는 “사리사욕과 아집 그리고 편견으로부터 해방되기”입니다.
김명호 교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합리적 보수주의는 진보성의 “성급한 과단성”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박훈 변호사는 최후변론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양심의 자유”가 재판관 개개인의 정신세계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아집과 "그 아집을 알아차려(惺:Mindfulness) 존재의 실상에 합일하려는 계몽“(Enlightenment) 사이의 투쟁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고통의 현상태인 자본주의의 골통에 이런 ”염궁“을 일상적으로 얼마나 힘차게 날리고 있습니까?
정지영 감독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데에 매몰되어 있는 대중, “기술적으로 첨단을 누리지만 지혜의 GPS가 고장 난 바보들”에게 인간이 저렇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세월에 조각하다 간 한 인물에 관한 대작을 제작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분의 “현재로서의 과거에 대한 염궁”이 기대됩니다.

글쓴이:
최형록 (전)사회민주주의 청년연맹 지도위원, (전)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전) 민중회의 기관지 편집위원장, (전) 진보평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