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한철을 나희덕과 함께 했다면 지리 한 장마와 홧홧한 여름에는 조경란과 편혜영이 있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쓰는 이 글쓰기가 지구와 태양이 계속 돌고 있다는 것, 8월이면 말복과 함께 입추, 처서, 이런 가을 절기가 바짝 와 있다는 것도 새삼 실감하게 한다. 지나간다는 것, 새삼 삶이 두려울 것 없는 것은 요 며칠 폭염도 곧 지나갈 것이라는, 너무 가까이 왔던 태양은 조금 멀어져 적정한 거리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나 희망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자연의 이치가 고맙고 넉넉함을 전해온다.
소설읽기 오전반의 조경란과 오후반의 편혜영, 이번 작가 선택은 참여자들 성향에 어울릴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약간의 두려움으로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성향과 스타일은 달라도 어느 한 점, 책을 읽는 내가 책 속의 누군가와 또는 책을 쓴 작가와 만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말의 링크, 한순간의 찌리릿, 그것은 무엇일까? 부디 그런 한 점이 있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나에게 조경란은 오래 전 작가다. 우리는 어떻게 만났을까? 그림과 글이 잘 어우러진 예쁜 책 <조경란의 악어이야기>가 있었다. 아마 PAPER 잡지 같은 데서 소개하지 않았을까 라는 기억도 만들어본다. 그 책 이후였을까? 아무튼 그 후 조경란을 찾아 읽었다. <국자이야기>에서 공감했고 <풍선을 샀어>에서 위로받았고 <혀>는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 조경란을 같이 읽으며, 그들은 결이 다르기도 하고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아, 나는 뭐가 좋았던 게지, 정말, 우리는 어느 한 점에서 어떻게 만났을까, 생각해 본다. 한 여자와 한 남자, 두 세계가 만나는 이야기 <복어>를 소개한다. 어떠한 한 여자이고 어떠한 한 남자인지 우리는 조금 이해했다가 조금 실망했다가 조금 두려워했다가 조금 답답해했다가 조금 안도했다가 계속 그럴 것이다.
<복어>의 표지는 처음부터 직설적으로 암시했다. 회색의 벽면이 두 개 보이고 한쪽 벽면에는 그림이 걸려 있다. 그 액자 아래 조경란 장편소설이라고 박혀 있다. 바닥은 빨갛고 덩그러니 놓여 있는 소파도 빨갛다. 그 위에 나신의 여인이 고개를 기대고 한쪽 팔을 떨구고 다리를 그러모아 앉아 있다. 여인의 얼굴은 붉다. 귀도 붉다. 머리도 붉고 입술도 붉다. 내게 보이지 않는 것은 알 수 없는 다른 한쪽 팔, 그리고 여인의 몸 중앙에 검은 타원이 있다. 아니 검은 타원은 여인의 몸을 가리고 그림 위에 잉크를 부었다. 그 속에 크게 복어라는 선명하게 하얀 글씨, 그 아래 Blowfish 라는 적색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게 찍혀 있다. 검은 타원은 여인의 몸을 가렸지만 독자로 하여금 이것은 ‘죽음’에 관한, 조금 더 정확하게는 ‘자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고 미리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그래서 고백하건데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표지의 그림은 표면만 이야기했다. 이제 내면은 책을 끝까지 읽어야만 얻어지는 선물이 아닐까 싶다.
< 복어 표지 >
총 4부의 구성으로 그 안에 67개의 세부적인 이야기들이 제각각 번호가 매겨진 채, 소제목을 머릿돌로 올리고서 전개되고 있다. 홀수의 번호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고 짝수의 번호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서로 아는 두 사람이 되어가는 이야기, 고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시 제목 같은 단단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소제목을 휘리릭 훑는다. 어느 제목에서 멈추면 이야기를 상상한다. 아, 이렇게 죽는 건가, 아니,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 둘 사이를 계속 오락가락한다. 짧게 짧게 끝나는 그녀와 그의 이야기를 번갈아 읽다보면 그녀의 이야기에 빠지기도 전에 그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바람에 나는 그 둘을 팽팽하게 양날의 칼처럼 붙잡고 읽어야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투덜거리며 낙서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끝까지 가는 것은 아니겠지, 그들은 언제 만나는 거야, 설마 만나기는 만나겠지. 급기야 제1장의 마지막 챕터의 마지막 문장, ‘그녀는 공기처럼 몸에 달라붙은 연기를 탁탁 털어내며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어찌나 기쁘던지. 하지만 이 만남은 퍼즐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조각가인 그녀는 서울에서 도쿄로 거처를 옮겨왔다. 그러나 죽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녀, 죽음과 씨름하는 그녀다. 건축가인 그는 우연한 모임에서 한 여자를 눈에 담게 된다. 여자의 얼굴에서 자살한 형의 잔상을 발견한 남자는 끊임없이 죽음의 충동에 시달리는 삶을 견디고 있는 그 여자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각기 자살을 통하여 무엇을 증명하려 했을까? 한때 일본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인간 실격>의 다자이 오사무,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오,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라쇼몽>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일본문학에는 자살의 코드가 팽배하다. 자살한 작가들은 그 외에도 너무 많았다. 예술가의 자살에의 충동, 조각가와 건축가, 그들이 만드는 형태는 가족의 기원을 넘어서고 싶었을까. 어린 아들과 남편을 앞에 두고 복어 한 그릇을 뚝딱 먹으며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녀의 증조 할머니, 밤마다 창문을 닫고 가는 엄마가 돌아가면 다시 창문을 열고 잠을 청하는 형은 그 창문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에게 빨리 와, 라고 전화를 남겼다. 여자는 죽음의 이유를 찾아야했고, 남자는 죽음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했다. 그 둘은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