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사주는 <새벽강> 술집 주인 강은자 씨가 ‘소장품전 : 새벽강에는 은자가 산다’를 6일부터 14일까지 전주 남부시장 복합문화공간 ‘모이장’에서 연다.
1993년 대입 재수생 박진희의 그림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모아온 지역작가 작품이 250점.
“그때 힘든 애들밖에 없었으니까!”라며 시작한 작품 구입이 전업 작가 초대전으로 이어졌다.
2000년경 곽승호를 시작으로 2016년 김춘선 개인전까지 20명의 화가가 20회 전시를 치렀다.
<새벽강>을 자주 찾던 화가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던 그는 ‘전시할 때 돈을 주는 것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김밥을 싸주기 시작’했고 가끔 그림을 사주곤 했다.
‘처음 말했을 때는 싫다고 눈을 흘기곤 했는데 올해 들어서부터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새벽강을 연구한다더니 자꾸 강은자 인생을 꼬치꼬치 파고들어서 그만 좀 하라고 화도 냈지만 이 모든 게 ‘장난 같다’라고 웃기도 하고, 하려면 똑바로 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한다.“(‘새벽강 연대기’ 일부)
[새벽강 연대기]
#공연과 전시를 좋아했던 20대 은자 씨
20대 초반부터 전주에서 공연되는 연극은 거의 다 보러 다녔다. 월이소극장(금암동 거북바위
근처), 전북문예소극장(다가동), 창작소극장(동문거리), 황토예술극장(동부시장) 등 주로 소극장
을 찾았다. 지금까지 생각나는 작품은 1993년 코아백화점 앞에서 펼쳐졌던 창작극회의 마당극
<꼭두, 꼭두!>(연출 곽병창)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연극을 보러 가지도, 소극장 나들이도 하지
않는다.
20대 때 다방을 드나들며 미술작품 전시도 많이 찾아다녔다. <사리문다방>에서 ‘박민평, 유휴
열, 하반영 3인전’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겐지갱’의 살림꾼 30대 은자 씨
음악 들으러 많이 드나들던 전북대 앞 <느티다방>과 술집 <지나다 들렀습니다>에서 박남준
등을 만났다. 안면만 있던 박남준과 <느티다방>에서 열린 ‘시인캠프’로 친분을 쌓게 되었고,
여러 사람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86년에 풍물패 ‘겐지갱’을 결성했다. 안병탁, 이정수, 박남준 등이 중심이 되었고, 이어서
강은자, 김연주 등이 합류했으며 이동엽, 유휴열, 이종진 등이 함께 어울려 다녔다. ‘겐지갱’의
중심 활동은 매달 음력 보름, 다가산 아래 전주천 냇가에서 펼친 '보름굿'이었다. 관광호텔 근
처 지하실에 사무실도 내고, 약 3년여 빠짐없이 굿판을 벌였다.
풍물패 ‘겐지갱’은 1991년에 해산했다. 동호회 형태로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과 단체를 키워
공연 사업을 하자는 이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어 결국 ‘공중 폭파’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이때의 강은자를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굿판 뒷수발을
들고, 청소도 하고, 음식도 챙겨 먹이며 사람을 다독이는 일을 곧잘 했다고 기억한다. 사무실
임대료도 거의 강은자가 냈다.
#커피방 ‘새벽강’과 은자 씨
1987년 이전, 일명 ‘카포-버스 포장마차’를 들락거리며 사람들과 친분을 쌓다가 남부시장 팔
달로 인근에 <그리운 소나무>란 이름의 가게를 열었다. 지인과 동업했으나, 3개월 정도 운영
하다가 그만두었다.
1993년 봄부터 6~7개월 정도 후배 배영한이 운영하는 커피방 <새벽강>을 대신 운영했다. 남
노송동 군경묘지 올라가는 삼거리 <범양약국> 근처에 1991년부터 있던 이 커피방은 배영한이
아내를 위해 놀이터처럼 만들어 준 곳이었으나, 사정이 생기면서 본인이 맡게 되었고 결국 자
신의 놀이터가 되었다. 자기가 20대에 드나들던 음악다방 같은 곳처럼 운영하고, LP 음반을
많이 틀었다. ‘새벽강’이라는 이름은 커피방 실내장식을 해 준 김현철이 지어주었다.
1993년 커피방 <새벽강>에서 화가 박민평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성심여고 교사였던 박민평은 집에 가기 전 꼭 들러 차를 마셨다. 물(엽차)을 끓이는 버릇도 이곳을 운영하면서 시작됐다.
운영 기간이 6~7개월로 짧은 이유는 커피방이 무허가 건물이었는데, 도로 개설로 철거 예정이
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유했던 LP는 후배에게 넘겨줬다.
#남노송동 술집 ‘새벽강’과 은자 씨
1993년 가을, 전주고 강당 쪽 담장길에 <새벽강>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본격적으로 술집을
시작했다. 옆집 <대화페인트> 정동철이 많이 도움을 주었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당시 장사가 잘돼 1년도 안 되는 동안 천만 원 정도의 빚을 갚았다. 오징어볶음, 두부김치 같
은 안주는 이때부터 있었다. <새벽강>이 있던 곳 역시 무허가 건물이었고, 도로 확장공사가
시작되면서 9~10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동문사거리 ‘술’, 새벽강과 은자 씨
1994년 가을, 동문사거리로 옮겨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룸살롱처럼 운영하던 가게 자리였는
데, 권리금 1,500만 원에 인수해 내부를 조금 바꿔 운영하였다. 서너 칸으로 구분된 칸막이
구조는 그대로 두었다. 맞은편 건물에 <원화실> 선팅이 남아 있던 곳에 이기홍의 작업실이 있
었다.
전주고 옆 <새벽강>부터 알던 이들이 많이 왔다. 문학, 풍물, 판소리,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이 주축이었다. 풍류를 즐기고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도 잦았다. 전북작가회의,
청년문학회 회원들의 행사 뒤풀이와 열띤 토론, 전북민미협 화가들의 전시 모임, 전통문화사랑
모임 식구들의 소리 한 자락을 곁들인 ‘전주문화’에 대한 격의 없는 대화들이 새벽까지 펼쳐
지곤 했다. 그리고 <새벽강>의 독특한 분위기를 좋아해 준 더 많은 사람이 참새 방앗간 찾듯
들렀다.
당시에도 메뉴판은 있었는데, 돈 없는 문인·화가들이 오가는 모습에 차마 안주 뭐 시킬 거냐고 물을 수 없어서 그냥 이것저것 내주기 시작한 게 ‘<새벽강>에는 메뉴판이 없다’라는 인식으로 연결되었다.
2002년 전후, 칸막이 공간을 철거하고 통나무를 그대로 잘라 확 트인 느낌으로 고쳤다. 화순
에서 죽염을 만들던 김재철이 공사했다.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세계소리축제 등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전주의 멋과 맛을 찾아다니던 외
부 인사들에게도 <새벽강>이 소문나기 시작했다. 축제 시즌마다 많은 사람들이 놀다 갔다. 영
화평론가 유지나는 해마다 대학원생들을 몰고 와 춤을 추며 즐겼다. 전인권, 나윤선 등 유명
음악인들도 자주 방문했다. 김반장, 그릇밴드 등은 공연도 했다.
영화 보기를 좋아해서 2009년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개관부터 지금까지 내 집처럼 드나든다.
<새벽강> 복도에 항상 독립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이유다.
2016년, 그러잖아도 가게를 옮겨야 할 사정이 있었는데 김병수가 ‘이음’ 사무실로 쓰던 다가
동 3층 건물을 사라고 제안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빚을 내 사버렸다. 그해 6월 3일 밤, ‘단골’
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이 몰려와 ‘마지막 영업’을 기념하고 새벽까지 놀았다. <새벽강> 계단에 ‘이전 안내’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다.
#다가동 새벽강
2016년 6월 15일, 다가동에서 새로운 <새벽강>이 문을 열었다. 동문사거리에서 쓰던 간판을
그대로 떼어와 내걸었다. 단골 손님들이 여전히 찾아와 주었지만, 아직 동문사거리에 젖어 있
던 사람들에게는 다른 위치, 낯선 분위기였는지 많이 뜸해졌다. 그래도 <새벽강> ‘골수팬’들은
꾸준히 드나든다.
객리단길, 웨딩거리, 차이나거리가 활성화되고 젊은 여행객이 많아지면서, <새벽강>은 ‘돼지
뚝배기 맛집’으로 여러 블로그와 SNS에서 유명해졌다. 이른 시간부터 MZ세대로 북적거리면
서 예전처럼 거나한 술판, 노래판, 굿판은 보기 어렵게 되었다. 너무 유명해져서 손님들 안주
만드느라 강은자랑 놀기는커녕 대화 나누기도 어렵다.
새벽별 보기 일쑤였던 동문사거리 시절에 비해 영업시간도 줄어서 9시쯤이면 손님이 거의 없
다. 요즘 음주문화가 변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주모 은자 씨가 나이 들어가면서 늦게까지 장
사하는 게 힘에 부치는 탓도 있다. ‘인제 그만두고 남이 해 주는 안주에 술 먹고 놀러 다니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The article also details the various locations and transitions of Saebyeokgang over the years, highlighting Kang Eun-ja's dedication to the bar and the artistic community. The story culminates in the upcoming "Eun-ja Exhibition," which will mark the closure of Saebyeokgang on December 6, 2025, after decades of serving as a haven for artists and art lov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