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정에서 아버지와 수제비를 먹었다.
수제비보다 밥이 좋다는 우리 아버지.
...
아버지의 부쩍 하얘진 흰머리와 만났다.
닦다가 놓쳤을 아버지 눈가의 눈시울과 만났다.
...
가끔은 내가 저 보라색 수국이 되어
아버지와 따스한 차 한 잔 곁들이며
친구처럼 마주하고프다.”

(만남Ⅱ, 130.3×130.3cm, 장지에 혼합채색, 2012)
한국화가 이은경(45) 씨가 2012년에 ‘일상에서의 만남’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면서 도록에 써넣은 글이다.
이 작가는 이렇게 일기를 쓰듯이 그림도 그린다. 그 일기의 소재는 일상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활짝 핀 꽃봉오리와 나무, 창이 많은 집, 찻상과 밥상, 다기와 식기, 새와 달 등 친숙한 사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가 자기의 환경을 떠난 그림을 그릴 순 없다는 게 이은경씨의 생각이다. 남의 일기를 쓸 수 없는 것처럼. 설령 그렇게 그렸다 한들 그게 작가 자신의 그림은 아니다.
이은경 작가는 2010년에는 ‘일상에서의 성장’을 주제로, 2012년과 2014년에는 각각 ‘일상에서의 만남’, ‘일상에서의 초대’를 주제로 전시회를 여는 등 꾸준히 일상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왔다.

(초대Ⅰ, 130×130cm, 장지에 혼합채색, 2014)
작가는 자신이 몹시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래서 자신이 내면에 갖고 있는 사랑을 ‘그림에’ 표현하고 싶어 한다. 작가의 말이다.
“제 그림을 보고 누군가가 느낀다면, ‘아, 그림 안에 사랑이 있구나!’ ‘행복이 있구나!’ 하고 느끼면 좋겠어요. 어떤 슬픈 마음이 있는 사람이 제 그림을 보고 ‘아, 편안하다!’ 하는 정도만 느낀다면 저는 만족해요.”
작가 내면에 항상 행복과 사랑이 넘쳐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작가 자신은 많은 내적 갈등과 슬픔, 괴로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진단한다.

(하늘이 주는 양식 감사, 72.7×90.9cm, 장지에 혼합채색, 2012)
“어쩌면 그림은 사실 ‘내가 이렇게 되고 싶은 것’이에요. 마음속에 사랑과 행복, 평화가 충만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내 안에 그것들이 부족하니까 그것들로 갈급한 제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거죠.”
그 마음은 특히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되며, 작가가 바라는 색채와 질감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끈기와 억척이 동반된 인내의 과정이다.
실제로 작가는 마티에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아가 질감은 작가가 바라는 색감을 만들어내는 것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엄마는 새다, 90.9×72.7cm, 장지에 혼합채색, 2014)
작가는 채색에 앞선 밑 작업에 전체 작업량의 절반을 할애한다. 질기고 소박한 느낌이 강한 5배접 장지에 색깔을 입히기 위해 먹물과 한국화물감, 분채, 과슈, 아크릴 등 수용성 물감을 두루 사용한다. 작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가는 돌가루를 물감과 섞는 등 질감 표현에 특별한 공을 들인다. 돌 작업은 작가가 대학에 재학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 11월 이 작가는 우진문화재단의 2015년 청년작가로 선정됐다. 경기도립미술관 최효준 관장은 심사평에서 “은은하고 깊이 있는 색채감과 질감 면에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했다”고 칭찬했다. 작가의 창작 과정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 같은 평가는 우연이 아니다.
최 관장은 한편, 이 작가에게 “구성의 단조로움과 산만함을 극복하고 장식성의 한계를 넘어 회화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치열하게 천착해 달라”며 기대를 담아 조언했다.
미술평론가 김상철 교수는 반대로 “단촐한 화면 구성과 평면적인 화면 처리는, 오히려 보다 폭넓은 여운의 여백을 통한 공감의 울림을 확보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소꿉놀이, 60.6×72.7cm, 장지에 혼합채색, 2012)
어떤 관람자들은 이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민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최효준 관장도 “민화적 조형성으로 현대적 감성을 갖춘 ‘현대의 민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준다”고 호평했다.
작가 자신은 이 같은 평가들에 대해 귀를 기울이며 감사를 표현한다. 아울러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도 감사한다.
“힘든 현실에서도 ‘나는 꼭 해야 돼’라며 작업하는 작가들 보면, 그들 작업에 정말 가슴 찡한 울림이 있어요. 저에게도 그림은 힘이 돼요. 살면서 힘이 들 때, ‘아, 그래도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하고 뿌듯해 해요.”

(일상, 56.5×28cm, 장지에 혼합채색, 2014)
이은경 작가는 전북대 예술대학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 미술학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여섯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93년부터 2012년까지 모두 열네 차례 수상한 경력이 있다. 현재 화기애애, 시공회, 한국미술협회 등에 속해 있다.
(※이전 화면 작품=단비가 내리다, 53×100cm, 장지에 혼합채색,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