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책의 제목을 보다 보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앞이나 뒤에 세 글자 정도를 더 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 됐어. 또는 아, 그래. 그렇게 사족을 붙이고 나면, 어쩐지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읽히고, 입 밖으로 진심 한 덩어리가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었으니. 난 내가 뭐가 될지는 모르겠고, 딱히 확신도 없어. 지금 당장 그게 많이 궁금하지도 않고. 그래도. 아, 그래. 뭐라도 되겠지. 이런 무책임한 진심이.
(출판사 제공 책표지)
조금 전 설명한 나의 행동이, 작가에게는 무례한 행동이 될지도 모르지만, 구태여 내가 덧붙인 석 자들을 제외시킨 이 책의 진짜 제목은 '뭐라도 되겠지'다. 말 여섯 자에 지나친 의미부여가 될 수도 있지만, 뭐라도 되지 않을까? 같은, 누구에게 묻는지도 모를 의문조차 붙지 않는다는 점이 퍽 매력적이었다. 조금 유치하게 표현하자면, 넌 커서 뭐가 될 거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사냐는 말이 숨어 있는 듯한) 친척 어르신들의 말씀에 귀를 막고 안 들리는 시늉을 하는 모습 같아 마음에 들었다. 사실 저 여섯 자를 진심으로 내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도 어렵던 나에게, 이 책은 내가 듣든 말든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괴짜 이야기꾼 같은 면모를 보였다.
굳이 책의 세 쪽 넓이로 펼쳐지는 차례를 보고 있으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 공통점도 없는 제목들이 한데 모여 있을까 싶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다, 종종 등장하는 카툰들은 더욱 궁금해진다. 저 엉뚱한 상상은 왜 실려 있는 걸까. 각각의 페이지가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그리고 작가는 그 이야기들을 큰 주제나, 의식, 흐름으로 묶으려 하지 않는다. 분명 소설가가 본업이라고 책 날개에 써 있었지만, 그 직업에 관해 막연히 갖는 이미지보다 훨씬 더 가벼운, 그리고 즐거운 말투로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커다란 줄기가 없기에, 챕터를 통째로 넘겨도 이해에 문제가 없을 만한 내용이지만, 즐거움과 재미가 그러한 행동을 막는 느낌이다. 어떠한 의무감으로 읽지 않을 만한, 그리고 그럴 수도 없는 책이다. 책의 후반부쯤에 오면,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작가로서 무책임한 건 아닐까? 아니면, 이런 책을 내는 출판사가 무책임한 건가? 싶은 되지도 않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즐거운 무책임에 손목을 잡힌 채 끌려 오다 보면, 더 이상 무책임이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남은 페이지 수만큼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래, 꼭 책임을 져야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아는 세상의 절대 다수인 내 또래는 책임을 질 능력이 없는 일에도 당당하게 무책임을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어떻게 보면 허세일 수도, 어떻게 보면 압박감일 수도 있는 그 분위기에서 나도 빠져나오기는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당한 면책과 비난받아 마땅한 무책임을 구분하지 못했다. 하물며 가볍고 즐거운 무책임에 관해 접할 일은 얼마나 있었을까.
너무도 당연히, 책임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무책임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청춘이라는 이유로 지금의 막막함을 견뎌낼 수 있다는 자기 위안이 아닌, 앞이 캄캄하긴 한데, 방법도 모르긴 하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무책임한 태도. 이 책은 그런 태도에 구실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제목의 책이 나오는데, 그래. 이 책처럼 나도, 뭐라도 되겠지. 그런 뻔뻔하고 무책임한, 그러나 즐겁고 편안한 스스로의 면책.
그러나 이토록 자유분방하고 즐거운 이야기의 끝에 조건이 하나 붙는다. 너무도 당연해서 책을 읽는 사람도, 읽지 않는 사람도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이 즐거움의 필수 조건.
책의 마지막 챕터는 '어떻게든, 살아남기'다. 유치원생마냥 제멋대로 머릿속을 통해 우주 몇 바퀴쯤 돌고 온 듯한, 럭비공 같은 흐름의 이야기치고는 뜻밖에도, 도시는 야생보다 무서운 곳일지도 모른다며, 어떻게든 살아남자는 말로 마무리된다. 아마 작가가 지은 제목의 풀 네임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그러면) 뭐라도 되겠지, 또는 뭐라도 되겠지,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살아남는다는 거창한 표현이 아니어도 좋다. 어떻게든 버티기. 이미 버티는 것 자체가 살아남는 게 되어 버렸으니까. 학교에서, 학원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인간관계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되겠지. 굳이 관계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스스로가 버티기만 한다면, 뭐라도 될 테니 버티자. 그리고 또 뭐든 되겠지. 책의 제목과 마지막은 끝없는 순환을 주었다. 여운이나 열린 결말을 떠나서, 이런 건 적당한 선에서 작가가 멈춰 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아무렴 어떤가. 뭐라도 되겠지.
(사진=이한결)
※ 전북교육신문은 매주 금요일 [내 마음을 움직인 책]을 싣습니다. 이번 주 글쓴이가 다음 주에 책을 소개할 사람을 지명하는 방식으로 이어갑니다. 다음 주에 책을 소개할 사람은 전북희망나눔재단 황현우 간사입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