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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교수 전주 강연 지상중계③


... 문수현 (2017-02-23 00:26:57)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67)의 20일 전주 강연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차별과 배제의 땅 후쿠시마’의 내용을 세 차례로 나눠 싣는다. [편집자]

알렉시예비치의 예언

후쿠시마 현실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라는 벨라루시의 여성소설가에 대해서 알고계실 겁니다. 재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인데요.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소설을 썼죠. 노벨상의 대상이 된 작품은 그 작품뿐 아니라 <세컨드핸드(중고품)의 시대>라는 대작인데,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체르노빌 현장 리포트였기 때문에 일본에도 독자가 어느 정도 있어요. 본인도 후쿠시마에 당연히 관심이 있고요. 지난해 11월에 일본에 왔어요. 도쿄외국어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겠다 하니까 수상식에 왔죠. 오면서 후쿠시마를 방문하고 싶다 해서 저도 같이 돌아다녔어요.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부제가 ‘미래의 서사’예요. 우리는 미래라는 말을 희망적인 이미지로 생각하죠. ‘미래지향’이라는 말 그대로 보죠. 아무 근거 없이 “밝은 내일이 올 거다”라는 게 미래라는 말의 어감이죠. 그런데 ‘미래의 서사’에서 미래란 우리 인류의 미래가 체르노빌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체르노빌과 같은 사고를 겪을 거라는 예언이에요.

이 사람이 그걸 썼을 때, 러시아인이니까 일하는 게 너무 조잡해서 사회주의이고 관료주의니까 이런 사고가 났다, 일본 같은 나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냉소했었어요. 이 사람은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일본에 오고 토마리라는 북해도에 있는 원전에 찾아가서도 얘기 나눴는데 일본인들로부터 그런 대답을 들었었어요. 그런데 알렉시예비치가 예언한 미래가 후쿠시마에서 실현됐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이후 후쿠시마 이전에 소설을 썼는데, 지금은 체르노빌 이후 후쿠시마 이후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그렇게 역사에서 배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지금 일본정부는 역사에서 배우기는 커녕 오히려 원전에 집착하고 있어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숨어있는 제일 큰 이유는 군사적 이유라고 저는 봅니다. 플루토늄은 언제든지 군사적인 핵무기 재료로 전환할 수가 있고, 전환하겠다는 야망을 지금은 숨기지 않아요, 요즘은. 일본정부가. 예를 들어 이시바 장관이 직접 얘기했고, 아베 수상도 수상이 되기 전에 심포지움 같은 데서 일본도 앞으론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얘길 했어요. 일본은 헌법구조상 군대를 포기한 나라인 처지를 포기했을 뿐아니라 세계의 핵보유국이 되려는 욕심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아요. 작년 유엔총회에서 세계적 핵무기 금지조약이 거론됐을 때 세계 123개국이 찬성했어요. 핵보유국인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이런 나라가 반대하고 기권한 나라도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유엔총회에서 결의돼도 실현성이 없어요.

그런데 일본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반대까지는 안했어요. 기권했었어요. 세계 유일의 피폭국가라는 게 말하자면 자신들의 세계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지난해는 드디어 반대했어요. 앞으론 핵무장 하겠다는 의사표시겠죠, 세계적인. 이렇게 하면서 한편으론 원폭피해를 받은 유일한 나라다, 하는 이중기준 그게 일본이란 국가의 특징이에요. 국민대다수가 ‘우린 평화애호자’라고 믿고 있음에도 세계적인 중장비를 다 지니고 있는 군사 국가이고, 얼마든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확보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금 원전을 중지하면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가 없어지죠. 그래서 필사적으로 그걸 지키는 거예요.

둘째,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가 ‘동경전력’이라든지 ‘도시바’(전력기계제조) 같은 대기업과 유착돼 있는데, 이들 대기업의 이윤을 중시하죠. 그런 기업 주주들이 일분 부유층이 많아요. 셋째, 후쿠시마를 비롯한 일본 곳곳의 원전 지방은 한편으로는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의 식민지죠. 대도시 주민들의 전력 위해 자신들이 희생당하고 있어요. 그런데 보조금 명목으로 국가가 돈을 줘요. 그 돈으로 오래 30~40년을 살아와서 다른 생활방법에 대해 상상할 수가 없어요. 촌장 면장 시장 지사가 그런 사람들이니까 지방정치를 쉽게 바꿀 수 없어요. 학계 학자들도 연구명목으로 연구비 받고 평생 바치며 살아왔고요. 그런 타성이나 관성을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은 원전을 더 많이 만들고 수출까지 하려고 하죠. 원전 수출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베 신조입니다.

반원전 운동의 또 다른 차원: ‘반전 운동’

그러니까 원전을 막아내는 일은 그냥 환경을 지키자든지 그런 차원을 벗어나서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 근대 내내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의 구조 자체에 대한 아주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저항이어야 이루어질 수가 있는 큰 과제라는 거죠. 물론 거기에 여러 가지 그런 예비지식이 없고 또 기본적으론 보수적인 사람들도 물론 자기네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안정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안심해서 야채나 식물을 먹고 싶어서 하는 그런 소박한 이유로 모여오고 운동해줬으면 하는데, 그게 분단돼 있는 게 일본의 상황입니다.

일본 상황은 특히 후쿠시마는 아직까지 오염이 심하니까, 오염을 제거한다는데 제거 못해요. 제거 못하는 것이, 산이어서, 누가 산 구석구석까지 오염을 제거할 수 있나요? 또 제거작업도 안 해요. 산 옆에 있는 마을의 도로 정도지. 그런데 괜찮다, 괜찮다 기준까지 바꾸고, 귀환운동을 해요 국가가 스스로. 일단 피신한 사람들이 마을에 돌아가라. 자주피난자라는 말이 있어요. 너무 두려워서 무서워서 자기 스스로 자기 돈으로 도해로 피난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도 피해자니까 어느 정도 집세라든가 생활보조금을 받아왔는데 이게 올해 3월로 끊겨버려요. 마지막이 돼요. 그러니까 소위 자주피난자는 지원을 못받게 돼요. 그러니까 아무리 두려워도 돌아가든지 아니면 완전히 고향을 포기하든지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인데 일본 정치권, 지방정치가, 원전마피아들은 그런 상황에서 괜찮다, 괜찮다, 돌아가라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근데 원전 방사능의 피해는 그렇게 하루 이틀에 나오는 게 아닙니다. 10년 20년 지나서 나와요. 히로시마 원폭의 방사능피해도 지금까지 70년 지났는데 아직까지 소송 벌어지고 있어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의 2세들이 엊그저께 소송을 제기했어요. 70년 이후에. 그런 문제예요. 척도가 그렇게 길어요, 방사능이란 게. 그런데 눈앞에만 보고 괜찮으니까 돌아가라고 하는 게 정부이고 전력회사입니다. 보상을 잘 하고 싶지 않아서.

나하고 알렉시예비치가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후쿠시마를 돌아다녔어요. 그 중 한 사람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한 달 후에 자살하고 만 낙농가예요. 낙농가이니까 우유로 살죠. 그 우유가 오염돼 못살게 됐고 자신들의 소도 살처분해야 했고. 은행에서 돈 빌리고 생활도 못하게 됐죠. 근데 그분의 부인이 필리핀사람이었어요. 일본의 농촌에는 시집와주는 여성들이 많진 않아요. 그래서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 아시아 여성들이 들어와서 부부생활을 해서 아이도 낳아요. 그런데 그 필리핀 부인과 아이는 한때는 필리핀으로 피신했어요. 낙농가도 같이 갔는데 돌아와서 자신의 농장에 있으면서 자살했어요. 벽에다가 “원발만 없었으면”이란 유서를 쓰고 자살했어요. 이웃집 여주인에게 얘기 듣고 현장을 같이 찾아갔었어요. 벽에 남겼던 유서는 후쿠시마에 있는 사립 아우슈비츠평화박물관에 보관돼 있어요. 그대로 놔두면 우익들이 그걸 파손할 수 있으니까. 그런 상황입니다.

후쿠시마에서 가장 고민 많고 시달리는 사람들은 여성들이죠. 특히 젊은 어머니들. 어머니들은 당연히 불안하죠. 자신도 불안하고 아이들 공간에 대해서. 그런데 마을의 남자들은, 아저씨들은, 아 괜찮아 괜찮다, 너에게는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 없느냐 라고 얘기하고, 가족 안에 분쟁과 이혼도 많아요. 그렇다고 거기서 나와서 어떻게 먹고살아요. 울면서 이혼하거나 거기서 살거나 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인간의 마음에 깊이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 원전사고에요.

그런데 외면상 힘내라, 일본은 부흥할 수 있다, 훌륭한 민족이다, 그런 아주 자기중심적인 서사만 믿는 것이 일본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알렉시예비치가 돌아다니다 돌아와서 도쿄외대에서 명예박사 수여식 기념강연에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30년 전 체르노빌에서 봤던 똑같은 풍경을 오늘 후쿠시마에서 봤다는 게 하나고, 둘째 우리(소련)는 전체주의 국가였다, 그래서 체르노빌 때도 거의 저항문화가 없었다, 국가에 대한 요구나 비난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불가사의하게도 제가 와서 본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도 저항의 문화가 없음을 봤다, 왜 일까요? 하고 물었어요. 한마디로 일본도 전체주의 국가니까. 거긴 사회주의 전제주의, 여기는 자본주의 천황제 자본주의 국가에요. 그런데 그런 걸 우리가 알아야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는 거죠. 한마디로, 원전사고는 반전운동하고 직접 결부돼있고 우리의 역사와 직접 결부돼있고, 그걸 바라봐야 할 척도는 20년 30년 그런 짧은 척도가 아니고, 100년 150년 이런 근대 들어오면서의 척도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원전 중심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 외에도 예술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얘기하는 사람이고 학교에서는 예술학도 인권도 똑같이 두 개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는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인간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어나 숫자나 그런 걸로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몇 마이크로시버트 수치 이하니까 안심하라 이런 걸로 믿을 수가 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 두려움 그걸 다루는 게 예술이 해야 할 일이에요. 그러니까 예술도 인권도 똑같이 필요한, 서로가 깊이 관계가 되어 있어요. 오늘은 예술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마루키 화백에 대해선 얘기했지만요.

일본 원전 반대운동의 최대 장애물 - 노조

※ 다음은 청중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일부다.

- 왜 귀화하지 않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조선인이어서 조선국적이라는 걸 필사적으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제가 살고 있는 나라가 우리의 인간적인 권리, 우리의 인간적인 존엄을 잘 지켜주는 사회였으면 더욱 그렇겠죠. 그런데 아쉽게도 일본이라는 나라가 역사적으로 그런 나라가 아니었어요. 아니었음을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귀화할 수가 있어요?

- [“한국인의 피를 가진 교수님으로서, 우리한테 살아가는 데 대한 조언을 해주신다면?”이라는 질문을 받고] 한마디로 제가 귀화 안하는 이유는 방금 전 말씀드렸고, 그것이 제 생각으로는 한국인의 피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인의 피도 일본인의 피도 피는 마찬가지예요. 그게 아니라 근대사에 있어서 피지배자, 피식민지 지배자의 처지에 서왔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지배라는 게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곤욕적인 일인지를 피부로 몇 세대에 걸쳐 느껴온 사람이어서입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 일본에서 일본문화, 일본인들 먹는 음식이라든지 일본인들 좋아하는 그림이라든지 그걸 싫어해서라든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피 얘기하고 역사적인 경험 이야기는 혼동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이라는 나라가 하나도 안 바뀌었다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변화할 가능성이 희미하게 있었기는 했습니다. 한때는, 그러니까 패전 직후 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의 전후민주주의 풍토 속에서 꽤 리버럴한 그리고 자기반성적인 지식인들도 꽤 있었어요. 정치적 구도로 보면 일본사회당 그리고 교원노조라든가 노동조합들이죠. 당시엔 아시아 여러 민족하고 우호관계를 맺고 가야 우리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그렇게 대다수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꽤 있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이제 찾아내기가 힘들 정도로 소수파가 됐어요. 그런데 1990년대 들어가기 전에 세계적으로 동서냉전구도가 무너지면서 큰 변화가 왔어요. 일본에서 사회당이나 노조가 동서대립 구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에요. 거기서는 1/3정도의 소수파이긴 하지만 그래도 1/3정도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동서냉전 구도가 무너지면서 자신들의 이상도 잃어버리고, 이상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 기반조차 위협받게 됐죠. 예를 들어 교원노조가 일장기나 기미가요(국가)에 대해서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게양하거나 제창하는 것에 반대했었는데 그때부터 바뀌었어요. 조직을 방위해야 한다, 노조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기도 게양하고 국가도 불러야 한다, 이렇게 180도 바뀌었어요, 그때. 노동조합 전체가 그래요. 아까 후쿠시마 문제가 왜 어렵냐는 얘기를 하면서 미처 말씀을 드릴 수 없었는데(잊어버렸었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노조예요. 도쿄전력 노조가 민진당(제1야당)의 지지 세력의 노조가 도쿄전력의 노조예요. 동경전력의 노조니까 동경전력이 무너지면 곤란하다, 해서 원전폐기에 반대해요. 그 사람들의 표로 국회의원이 되니까 제1야당도 애매모호해요. 그런 구조에 있습니다. 질문자 말대로 일본이 일관되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변화할 몇 차례 호기는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그것을 놓친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걸 지원해야 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제대로 각성하게 해야 합니다.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하고 화해하는 게 아니라, 근대사 내내 우리 같은 처지에 섰던 사람들의 정직한 비판, 타자의 시선(“당신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볼 때는 당신들은 이거다”라는 것)을 주저 없이 지적하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저 사람들하고 싸우는 거라기보다 장래의 연대를 위해서 해야 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저 나름대로 일본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