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윤백일)
서예문인화반에서 동문수학하는 지인께 내 마음을 움직인 책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쩌다보니 손바닥 안의 작은 세상, 스마트폰에 의존해 세상과 소통하고, 알고자 하는 정보를 찾아내서 이미 반쯤은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요즘은 읽은 책이 없었습니다. 우겨서 이것도 독서라고 해봐야 당장 세상살이를 헤쳐 나가거나 관심사를 충족시켜줄 방편으로 읽은 책들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제게 가장 위대한 책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바로 “대자연(大自然)”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시와 문학, 그림과 글씨, 곡조에 담으려 하는 것, 가장 닮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연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 또한 자연일 것입니다.
비단 예술가뿐 아니라 그냥 평범한 생을 사는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그 어떤 위대한 예술도 다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요, 자연이 낳아준 것입니다.
또한 자연은 우리가 돌아갈 곳이기도 하지요.
산과 들과 강뿐만 아니라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어디에선가 불어와 나를 어루만지고 가는 바람. 눈발 속에서도 생명을 잉태하는 나무들... 눈을 돌리면 세상 어디에나 펼쳐진 대자연, 평범하지만 우주의 온갖 생명들이 운행하는 이 위대한 자연 앞에 새로운 것도 없고, 새롭지 않음도 없습니다.
이 위대한 책 자연, 그 다음으로 꼽을 것이 바로 이은성이 쓴 『소설 동의보감』입니다.
제가 막 스무 살 청년이었을 때 처음으로 만나 25년 동안 소설 동의보감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마음을 새롭게 하려고 읽었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머뭇거릴 때 또 손을 내밀었습니다. 한 번 잡으면 도저히 멈출 수 없어서 모두 밤을 새워 읽었습니다.
동의보감의 주제는 인간애(人間愛), 위대한 자연의 소중한 개체이며 그 자체로 소우주라 일컫는 사람의 몸과 인간에 대한 숭고한 사랑입니다.
“16세기 말! 조선 왕조 중엽의 두터운 신분 차별 속에서 천첩의 자식이라는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정1품 보국승록대부에 양평군이라는 작호까지 받았던 인물! 무덤 속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고 이 나라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사랑했던 사나이! 한방(韓方)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중국인에게까지 하늘의 손을 대신한 신인(神人)으로 숭앙받던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이 소설은 그 불꽃보다 뜨거운 생애를 살다간 허준의 일대기” (서설 중에서)
실존 인물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동의보감』은 그러나 단순히 의업(醫業)을 이어가는 사람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천출(賤出)의 신분을 감추고, 천신만고 끝에 당도한 경상도 산음 땅 조선 명의 유의태의 집에서 의탁하며 지리산으로 첫 약초산행을 다녀옵니다. 먼저 들어온 제자들의 못된 텃새로 약초 아닌 것들을 망태기에 담아 오게 되고, 호된 질책을 받게 됩니다. 이때 나타난 유의태는 허준의 망태기에서 나온 도라지 두어 뿌리를 주워들며 말합니다.
“못 찾았으면 모르되 찾았거든 단 한 뿌리라도 이런 정성으로 캐야 하느니...
초행부터 제대로 된 물건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 하나 도라지를 찾더라도 산삼이라도 보듯 이렇게 실낱같은 작은 뿌리 하나하나까지 다치지 않도록 애써 캔 그 정성을 말함이야...가상한 일이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약초를 대함에 있어 네가 과연 이런 정성을 언제까지 지닐지 그건 내 알 바 아니다만...”
유의태는 지리산의 골짜기와 능선에 자라는 수천만 뿌리 도라지, 그 도라지 한 뿌리에도 깊은 외경을 가진 인간이었고, 허준은 그것을 발견합니다. 또한 이런 정성으로 명저(名著) 『동의보감』을 찬술(撰述)했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공(公)과 사(私)가 애매한 풍속이기로서니 인명을 다루는 의원은 사사로운 인정으로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창녕 성대감댁 부인의 중병을 완치해 내고, 내의원 취재에 결정적 도움이 될 만한 추천의 서찰을 사례로 받아온 허준을 스승 유의태는 이와 같이 추상같이 나무라며 가차 없이 소개장을 촛불에 태워버리고 허준을 파문해버립니다.
내 아버지와 나와 내 자식, 그 자식의 자식까지 끝도 없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질곡의 굴레인 신분제도 아래서 ‘면천(免賤)할 길은 어의(御醫)가 되는 것.’ 이라는 말에 허준은 면천할 길을 찾고자 유의태의 벗인 괴승 김민세를 만나기 위해 안점산 삼적사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의 소굴인 것을 알고, 김민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나 내의원 취재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한양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환자를 돌보아주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마을 환자들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들을 돌보게 됩니다.
자신의 일생이 달린 내의원 취재로 시간을 낼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돌보게 됩니다.
5일 밤낮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환자를 보살핀 허준은 결국 내의원 취재 응시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반면 스승의 아들인 유도지는 똑 같은 곳을 그냥 지나쳐 내의원 취재에 응시하게 되고 입격하여 금의환향하게 되지만, 허준과 아들의 소식을 똑 같이 듣게 된 유의태는 절망하며 아들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스승 유의태는 자신의 불치병을 직감하고 마지막 병든 몸을 제자 허준의 의업(해부)을 위해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여 내어 줍니다.
자신의 의업을 이어가고 있는 외아들 도지를 제쳐두고 말이지요. 비인부전(非人不傳)입니다. 비인부전이란 중국의 서성(書聖) 왕희지가 자기의 제자들에게 했던 말로 스승의 안목으로 딱 합당한 인물이 아니면 함부로 예(藝)나 도(道)를 전해줄 수 없다는 사제간의 냉엄한 도리를 일컫는 경구입니다.
“허준은 보아라. 내 몸 속에 이미 불치의 병을 지니게 되었으니, 내 생전의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나의 문도 허준이가 세상의 어떤 병고도 마침내 구원할 만병통치의 의원이 되기를 빌며, 병든 몸이나마 너 허준에게 주노라. 지금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여, 사람의 몸속에 퍼진 삼백예순다섯 마디의 뼈가 얽히는 이치와 머리와 손끝과 발끝까지 퍼진 열두 경락과 요소를 살피어 그로써 네 정진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노라.”
유의태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은 허준을 위한 것이고, 그를 통해 병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돈이란 뭔가. 본시 그건 똥무더기와 같은 것이라서 세상에 고루 흩어주면 천하가 윤택할 거름이 되는 법이지만 혼자 끼고 쌓아두면 악취밖에 안 나는 오물일 뿐이라고.” 친구 김민세가 일갈한 것처럼 유의태는 자신의 몸을 세상에 고루 흩어주고 갔던 것입니다.

(출판사 제공 책표지)
고전(古典)의 매력은 재해석되어진다는 데 있다고 할 때, 나에게 『소설 동의보감』은 고전과도 같은 책입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스무 살 청년기, 사람을 관리하는 교도관의 길을 걷게 되면서, 또한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어서 읽어 본 30대의 동의보감,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부대끼는 인생을 살아 온 40대 중반에 다시 만난 허준이 또한 달랐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책을 펼칠 때마다 위대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인간애 앞에 숙연해진다는 것이고, 또한 새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읽고 나면 과연 내가 그들과 얼마만큼 닮은 삶을 살려고 했었는지 자문(自問)하며 자성(自省)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 동의보감』은 미완의 소설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왕 선조의 어가를 호종하여 의주로 피난하는 허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려내고 작가 이은성은 타계하고 맙니다. 『소설 동의보감』 자체가 원래 “집념”이라는 방송드라마 대본에 근거하여 쓰여진 소설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 이후로도 원작을 뛰어넘는 드라마를 보지 못했습니다.
드라마와 소설의 영향으로 허준과 유의태, 여타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대한 연구와 고증이 잇따라 그 실제에 논란도 있었으나, 이 소설을 지어낸 작가가 타계했으므로 허구와 실제의 차이에 대해 가타부타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다만 드라마까지 섭렵한 저로서는 소설이 주는 감동은 드라마의 감동에 곱절에 곱절을 더 쳐주어도 모자란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소설 동의보감』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읽히고 싶습니다.
무릇 남을 지도하는 자, 사람을 대하며 사는 자들은 허준과 같고, 유의태와 같아야 한다던 이 책을 소개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다시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허준을 향한 스승 유의태의 냉엄한 한마디가 떠오릅니다.
“약초를 대함에 있어 네가 과연 이런 정성을 언제까지 지닐지 그건 내 알 바 아니다만...”
※ 전북교육신문은 매주 금요일 [내 마음을 움직인 책]을 싣습니다. 이번 주 글쓴이가 다음 주에 책을 소개할 사람을 지명하는 방식으로 이어갑니다. 다음 주에 책을 소개할 사람은 전북대학교 건축공학과 이한결 학생입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