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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5-05-12 09:57:27

정조의 꿈, 화성


... ( 편집부 ) (2015-02-20 16: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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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황차돌)

“오늘날 수원시를 대표하는 건”이라고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답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화성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화성을 축성한 정조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할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이에 관련된 김준혁이 지은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라는 책이다.

저자는 수원에서 태어나 자란 수원 토박이다, 어린 시절부터 화성을 바라보며 자란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정조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고 현재는 수원화성박물관 학예사로 근무 중이다.

이 책은 처음에 영조, 사도세자간의 갈등으로 시작한다. 어렵게 얻은 왕좌와 자식사이에서 왕좌를 선택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와 집권 세력인 노론의 간계로 인해 성군이 될 자질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갇혀 죽은 아들. 이 책은 조선사 최대의 비극인 이 사건을 화성건축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달래기도 전에, 어린 정조는 자신의 목숨을 지켜야 했다. 노론은 자신들이 처단한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세운 원리는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역적지자 불위군왕[逆賊之者 不位君王].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매사에 조심했고, 학문과 무예 연마에 노력했다. 여기에 할아버지인 영조의 보호가 있었고, 결국 그는 국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영조는 정조를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일찍 죽은 효장세자(사도세자의 이복 형)의 아들로 입적시킴으로서 노론의 반발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노론은 정조를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심지어 정조를 암살하고자 자객을 보내기까지 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확실히 세울 필요가 있었고, 이를 실현할 대상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장소로는 수원을, 건축물로는 화성을 선택했다.

조선시대 선대왕의 왕릉을 잘 만들고 가꾸는 것은 현 국왕의 정통성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정조입장에서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에게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옹립함으로서 대응하고자 했다. 하지만 국왕으로의 옹립은 정조 계획의 제일 마지막이었고 그 시작은 사도세자릉을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그 장소가 바로 수원 화산(花山)이었다.

애초 수원 화산 아래에는 수원부 읍치가 있었다. 정조는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아버지의 묘인 현륭원(오늘날 융릉)을 조성한다. 그리고 정조는 읍치를 이전시키면서 양반부터 평민까지 모두에게 보상을 해주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정조의 애민사상을 강조한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정조가 ㅂ이전 어떤 임금보다도 백성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화성 축성공사에서도 모든 인부들에게 후한 임금을 주었고 겨울에는 양반, 그것도 고위층에게만 허용된 털모자와 귀마개를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당시 한문으로만 통보되던 관의 공고문을 한글로도 공표하게 하는 등 정조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시행하였다.

팔달산 아래로 수원 읍치를 옮긴 뒤 정조는 수원 읍치를 둘러쌀 성곽의 건설을 추진한다. 공사는 1794년에 시작돼 1796년에 마무리된다.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의 전통뿐만 아니라 중국의 성곽기술까지 적용한 범동아시아적 성곽이다. 공심돈이라는 군사 시설물에서 볼 수 있듯이 성곽의 군사적 측면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그리고 거중기, 유형거 등 최신 기구를 활용 공사비와 축성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다들 알다시피 정조는 화성 설계를 정약용에게 맡겼고 그의 설계가 밑바탕이 되어 화성이 건축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정약용만이 화성건축의 핵심 인물인 것처럼 생각한다. 저자는 이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정약용뿐만 아니라 화성 축성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특히 백성들이 더 기억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 정조의 애민(愛民)정신을 화성에서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출판사 제공 책표지)

정조는 단순히 화성이라는 성곽만 만든 게 아니다. 성곽 내에 수도 한양처럼 일직선 도로를 만들고 종각을 세웠으며 왕이 머물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왜 수원을 이렇게 한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만들었을까?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이었을까? 저자는 이를 정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바라본다.

정조는 화성을 만들면서 이 성곽도시를 상업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 지방에서 수도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위치한 수원에 상업시설을 만들었으며, 수원에서 장사하는 이들에게는 무이자 대출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화성 주번에 국영농장을 만들고 땅 없는 백성들이 경작을 하며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상업, 농업 시설을 보호할 군대를 만들었으니 이 군대가 바로 장용영이다.

정조는 자신의 재위기간에 화성을 상업, 농업, 군사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저자는 정조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성과를 전국에 확대하려했다고 말한다. 그 시기는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조의 아들은 조선 23대 국왕 순조다. 화성을 건축할 당시 순조는 어린아이였다. 당시 국왕이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15세였고 순조가 15세가 되는 해는 1804년이었다. 정조는 1804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려했다. 준비를 마친 뒤 순조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화성으로 옮겨와 거주하며 개혁을 더 힘껏 밀어붙이려 했다. 자급자족도시 화성을 통해 기득권만 지키려는 노론을 압박하고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역사는 정조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저자도 책 속에서 이를 아쉬워한다. 하지만 저자는 정조의 꿈이 아직 죽지 않았으며 그 꿈은 그가 세운 화성에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시간 되시면 수원에 오셔서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시길 부탁드린다. 이 짧은 글에서 다 소개하지 못한 정조의 꿈과 성곽으로서 화성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껴보시길 바란다.

※ 전북교육신문은 매주 금요일 [내 마음을 움직인 책]을 싣습니다. 이번 주 글쓴이가 다음 주에 책을 소개할 사람을 지명하는 방식으로 이어갑니다. 다음 주에 책을 소개할 사람은 이성철씨입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