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어느 날 20대의 젊은 청년은 카페 빈세트반고흐에서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을 넘어, 흰머리가 익숙해진 청년은 중년의 신사가 되어 다시 카페를 찾는다. 조금은 낯설어진 카페의 풍경, 그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추억 한 자락을 그는 찾았을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소녀는 이 카페 어느 자리엔가 앉아 펜을 끄적이며 그림에 대한 사랑을 뿌리내려본다. 그 소녀가 여인 되었고 그녀의 그림은 카페에 전시되고 있다. 그녀의 그림 안에 그려진 행복한 소녀의 얼굴에서 발랄하고 꿈 많은 소녀였을지 모를 그녀의 지난날을 그려본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많이 닮은 기형도 시인. 세상에 대한 한숨도 깊었고 시름도 많았던 그는 20대의 끝자락의 어느 날 극장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그가 별이 되고 나서야 그의 글은 빛이 되어 사람들에게 읽힌다. 그가 여기저기 발길 닿는 곳을 목적지 삼아 여행을 하던 어느 날 낯선 전주에서 이곳 ‘빈센트반고흐’에 잠시 머물렀음을 그의 책을 통해 접했을 땐, 다른 시간대의 삶을 살아가는 둘이 우연히 같은 공간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인연을 맺었던 영화 ‘동감’이 떠올랐다.
전주 최초의 카페 ‘빈센트반고흐’. 많은 예술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카페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2020년 2월에 찾은 그곳엔 젊은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고 금요일 저녁이면 종종 공연을 통해 소통하는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곳과 만남을 글로 남겼고 또 다른 누군가는 노래에 담았고, 그림으로 추억을 새겨두기도 했다. 전주에 터 잡은 지 10년이 조금 넘은 내게는 우연히 객사를 지나다 화려한 간판 사이로 세상 변화에 무심한 듯 자리 잡은 입구의 모습에 이끌려 들어간 곳이다. 어떤 공간인지도 모른 채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는 기분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뎌 놓는 두근거림과 호기심이 묘하게 교차하는 기분 좋은 설렘이라고 할까? 나만 아는 공간을 찾은 느낌이었는데 알고 보니 나만 몰랐던 곳이었다는 사실에 피식하고 웃음을 뱉어냈던 기억이 난다.
1979년부터 2020년까지 누군가의 20대가 머물렀을 자리, 그들은 여전히 20대의 삶을 살고 있거나, 30대, 40대, 50대, 그리고 6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이 자리에 앉아 스무 살 즈음의 나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운다면 어떤 모습일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같은 공간이지만 모두 다른 시대에 모두 다른 추억이 교차하는 곳. 오래된 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들도 한 움큼 쥐고 있는 ‘빈센트반고흐’.
독일에서 놀러 온 친구가 한국은 방문할 때마다 달라져서 좋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자고 일어나면 건물이 하나씩 세워지는 것 같다고. 모든 건물이 100년 이상 된 독일은 시간이 멈춘 도시 같다고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언젠가부터 혼자 제자리에 멈춰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가끔은 이 무자비한 변화에 현기증이 난다.
그럴 땐 카페 ‘빈센트반고흐’가 그리워질 것 같다.
어디를 둘러봐도 시계가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익숙한 듯 따뜻한 음악선율에 기대어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글/사진=김소정 객원기자)